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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쳤다. 첫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도로 덮었다. 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읽어나갔다. 소설본문은 책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절반에 약간 못미쳤다. 절반이 약간 넘는 나머지 부분은 외국인의 논문, 역자의 작품해설, 카뮈의 미국판 서문,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편지, 작가연보가 실려있다. 소설의 내용보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읽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1부는 주인공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툭툭 내뱉는 문체로 쓰여졌다. 1부와 2부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주인공은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 뫼르소다. (뒤에 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뫼르소'는 바다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양로원에 맡겨놨던 엄마가 죽어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뫼르소는 삶을 관조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그는 외부세계에 있어서도 내부세계에 있어서도 끈덕지게 밀착하기보다는 항상 조금은 떨어져서 관찰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 같으면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려야 정상이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뫼르소는 관조하면서도 그런 자세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육체적 피로가 앞섰고,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뿐이었다. 그리고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날, 여자친구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고 잠자리를 함께한다. 그에게 엄마의 장례식은 언젠가는 한번 겪었야 하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행동했을 법한 것들을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볼 시선을 느끼는 것이다.

   1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건이 터진다. 뫼르소가 같은 건물에 살던 레몽과의 관계에 얽혀서 우연히 총으로 아랍인을 쏴죽인 것이다. 사실 그가 총을 쏜 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어처구니없겠지만 정말로 태양 때문이었다. 그 아랍인에 대한 감정 같은 것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는 해수욕장 바위틈에서 그 아랍인을 다시 만났다. 그 아랍인이 자기에게 칼을 겨눈 것을 보고, 내리쬐는 태양에 눈썹 위의 땀이 흘러내릴 때 "우연히" "아무 이유없이" 발사한 것이다. 이 사건은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그리고 후에 뫼르소의 이 우연한 사건과 솔직한 태도는 재판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2부에서는 재판과정과 형무소에서의 생활을 그렸다. 마리와의 면회장면은 톨스토이의 『부활』이 떠오르고, 재판과정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연상케 한다. 1부에서는 주인공이 덤덤하게 무관심한 듯한 태도였다면, 2부에서는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나서 주인공은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1부와 2부를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고전적인 수법임에도 세련되고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어쩌면 카뮈의 시적인 묘사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래 위에서 바다는 잔물결들의 급하고 가쁜 숨결을 다하여 헐떡거리고 있었다. (67쪽)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70쪽)

   난 단순히 표현이 기똥차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뒤에 작품해설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소한 표현들도 다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너무 끼워맞추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카뮈가 『이방인』을 구상하면서 『작가수첩I』에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을 본다면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닌 것 같다.

   묘사와 더불어 내가 가장 관심있게 봤던 부분은 주인공의 삶에 대한 태도였다. 이는 작가의 인생관과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왜 이런 걸까.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근원적인 물음이다. 철학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표현에 있어서는 추상적이지만), 소설은 그 물음에 대한 철학을 표현하고, 역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는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카뮈는 인생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126쪽)

   쉽게 말해 인생은 엿같은 것이다. 그는 다른 소설들처럼 인생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단두대에서 죽는 것은 승천하거나 돌아가는 게 아니라, 목이 슬쩍 잘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사제의 꼬임에 넘어가지도 않는다. 독자는 공허하고 우울해진다.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정말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여기서 끝인가? 카뮈는 그리 무책임하지 않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주인공은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면서 삶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달라진다. 죄의식이나 종교가 아닌 "죽음"이 그를 바꿔놓은 것이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죽음은 삶이요, 삶은 죽음이다." 이것은 내 좌우명이다. 예전에 지인이 왜 그렇게 이 소설을 내게 권했는지 알 것 같다. 내 입맛에 딱 맞는, 나에게 딱 어울리는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부분)


   독서감상을 좀 두서없이 쓴 감이 없잖아 있다. 짧게 쓰고 싶은데, 관점에 따라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글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나 한다;; 그래도 역자의 작품해설을 따라서 앵무새처럼 지껄이지 않고, 내가 느낀 그대로 쓰려고 노력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다시 읽고 또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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