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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건 저번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신종플루를 겪고 난 후로 기력이 쇠약해지고 학기 말에는 모든게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나의 이성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톨스토이의 말마따나 절벽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발 밑의 끝없는 어둠을 보고 만 것이다. 사실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청소년기부터 사색을 할 수 있게 된 후로 몇 번이나 그 고통에 눈을 떠야만 했다. 더욱이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난 뒤에는 니힐의 손길이 나를 에워싸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죽으면 다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스스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이성의 이끌림을 받을 때마다 그 종착역은 자살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쇼펜하우어가 옳아보였다. 그러나 나도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실행할 용기는 없었다. 혹시나 나의 이성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을까하는 의구심과 이상할 정도의 긍정과 삶에 대한 희구도 한 이유였다. 그동안 나는 사소한 직업적인 목표에 매진해보기도 하고, 진보론에 의지해보기도 하고, 사회주의에 빠지기도하고, 신자유주의의 사탕에 매료되기도 하며 그러한 달콤한 꿀맛으로 삶에 취해보려 했으나 한번 발밑의 끝없는 낭떨어지를 본 이상 그 이미지는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서점을 헤매다 구입한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체험했다는 것을 읽었을 때, 나는 영문 모를 병에 걸린 환자가 만병을 통치하는 의사를 만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독백체로 묵묵히 적고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얻었던 해답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으로 적고는 있지만 나는 이 책에서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을 얻을 수는 없었다.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인 도식이 이미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 내 머리에는 도저히 들어갈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참회록 뒤의 인생론을 읽을 때에는 선과 사랑에 대한 강조가 늙은이의 잔소리로 밖엔 들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발 빝의 어둠을 보고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학문도 파헤쳐보고, 신앙에도 발을 들여다보지만 결국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철저히 "이성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결국 결론은 이렇다. 그가 자살을 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살은 악"이라는 선천적인 발상에서 나온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죽음이 될 수 없는 삶과 악이 될 수 없는 행복이 그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선악을 구분하며 이타적인 사랑을 역설하는 것이 좀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로썬 기생충 같은 생활을 하다가 자살에 이르느니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톨스토이식의 사고로 회귀하는 방법 밖에는 딱히 대안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안에도 선을 갈망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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