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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벌". 이 딱딱한 제목은 웬지 죄를 지어 벌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것 같아 펼치기 꺼려지게 했다. 내용 또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한 간접설교로 가득하며 지루하고 따분할 것만 같았다. 물론 제목에서 예상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내용이긴 했지만, 그 내용전개에 있어서는 내 예상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숨막히는 폭풍전개와 탐정소설 뺨치는 심리싸움은 700쪽이 넘어가는 책의 두께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의무감에 펼쳐든 책을 단 4일만에 완독해버렸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대학을 휴학한 상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좁은 하숙집 골방에 틀어박혀 공상을 거듭한 끝에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그건 다름아닌 전당포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없애고 그녀의 돈과 장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공상만 했던 그가 진짜로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는 소설 속에서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를 범행으로 이끌었던 사소한 우연들(술집에서 노파를 비난했던 어떤 사람의 말, 노파와 같이 사는 동생 리자베타가 7시 이후에 집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마치 그를 위해 도끼가 버젓이 놓여져 있던 것...), 페테르스부르크의 음울한 분위기와 하숙집 골방의 음침함-그러한 가운데 열병을 앓았던 것, 학비와 장차 미래를 위한 자금의 필요성 등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동기는 그의 공리주의적인 신념과 결합된 초인사상이었다. 그는 세상에 소수의 비범인과 다수의 범인이 있다고 봤다. 범인들은 주어진 질서에 순응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지만, 비범인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법과 질서를 바꾸는 사람들이다. 비범인들은 보통 인간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결국엔 승리하고 입법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범인들은 필연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데, 예컨대 나폴레옹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비범인인지 범인인지 그것을 살인을 통해 실험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한낱 사회적 '이'에 불과한 악덕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살해함으로써 그녀의 돈으로 얻게 될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구원 혹은 앞날이 창창한 자신의 미래를 위한 동시에 자기로 인해 도움이 될 사회를 위한 투자가치가 보였던 것이다. 그는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것을 소냐에게 고백할 때에도 학비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어떻게든 대줄 수 있었고 자신은 가정선생 일자리를 구하여 일체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신상의 안위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이같은 그 나름대로의 논리로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 하였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도끼로 노파를 내리친 그 날, 그는 예정에도 없었던 또 하나의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집에 일찍 들어온 리자베타가 현장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 죄가 없는 선량한 리자베타를 죽이고 나서 그는 당황했고, 그의 이론은 거기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범행을 저지를 때에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훔친 돈과 장물은 어느 마당의 벽돌 밑에 묻어놨기 때문에 증거가 될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고통 받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살인사건 이야기가 나올 때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든가, 범행의 현장에 다시 찾아가 기괴한 짓을 해서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와의 심리전도 그를 지치게 했다. 광신도라고 할만한 소피아 세묘노브나(소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듣고 그에게 자수를 권했다. 그는 소냐에게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한 거야. 그런데 그것이 나를 파멸시킨거야! ... 가령 나는 권력을 지닐 자격이 있는 것일까? 따위로 자문이라도 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이미 내겐 권력을 지닐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또 만약 내가, 인간은 이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라도 한다면 이미 내게 있어서 인간은 이가 아니며 인간이 이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회의를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똑바로 나아가기만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 나는 벌써 며칠을 앞두고 나폴레옹이라면 이런 짓을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하는 문제로 줄곧 고민했으니 자신이 나폴레옹이 아님을 확실히 안 셈이지 ..." (564~565)

   그는 괴로움의 숙고 끝에 자신은 나폴레옹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비범인들처럼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소냐의 측백나무 십자가를 받아들고 경찰서를 찾아가 모든걸 자백했다. 재판과정과 시베리아에서 형을 복역하는 내용은 에필로그로 넘어간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고, 여러가지 상황이 정상참작 되어 겨우 8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재판에서 왜 자수를 했느냐는 질문에 "진정으로 우러난 뉘우침에서였다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뒤에 가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 내 양심은 편안하다. 과연 형사범죄를 범했는지도 모르지. 법률의 조문이 찢겨 피가 흘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면 법률의 조문 대신에 내 목을 자르면 됐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물론 그런 것이라면 권력을 물려받았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획득했던 많은 인류의 은인들은 그 첫걸음에서 이미 처형받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자기의 첫걸음을 지켜냈다. 그래서 그들은 옳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견뎌내지 못했어.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첫걸음을 자기에게 허락할 권리가 없었던 셈이 된다.' 그가 자기의 범죄를 시인한 것은, 그것을 견뎌내지를 못하여 자수하게 된 그 한 가지 점에 있어서뿐이었다. (740)

   여전히 그는 그 이론을 폐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에 가서 시베리아에서 소냐의 무릎을 껴안고 눈물을 흘린 것은 죄를 참회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감춰오며 외면했던 소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의 사상으로 옮아가며 종교에 귀의한 것 또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녀와 새출발을 하기 위함이었다. 에필로그 그 어디에도 그가 죄를 뉘우쳤다는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 의외의 결말이긴 해도,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그려지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 할 종교를-그녀의 사상을-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결국엔 한 인간이 신에게 굴복하고 구원받은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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