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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재미없진 않았다. 역시 대작은 대작인가 보다. 민음사에서 나온 것은 1,2권으로 분권되어 있는데, 내용상 읽는 데에 버거운 것은 없었다.(민음사에서 나온 것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세로로 길쭉해서 책 펼치기가 불편하다) 고전소설이 삼류소설과 구분되는 점은 훌륭한 필치도 필치이려니와 무엇보다 작품 속에 시대상과 작가의 사상을 반영한다는 점에 있다. 『부활』은 그 점을 제대로 녹여냈다고 본다. 민중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정말로 톨스토이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타락에서 갱생으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드미트리 네흘류도프 공작'은 톨스토이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그가 상류사회의 안일하고 타락한 생활에서 '부활'하게 되는 계기는 과거 자신이 농락했던 '카튜샤 마슬로바'의 형사재판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되면서부터다. 긴 장편소설답게 여러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중심축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사실상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 두 명이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가 창녀가 되어 억울한 재판을 받게 된 이유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행적 때문이라고 보고, 죄책감을 통감한다. 그리하여 그는 죄없이 4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은 마슬로바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마슬로바가 있던 교도소의 또 다른 많은 억울한 사연들을 접하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재판과 구금제도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다. 그는 우선 마슬로바에게 행한 죄를 참회하기 위해 상류층의 친분을 이용하여 그녀의 석방에 안간힘을 쓰는 한편, 필요하다면 그녀와 결혼을 할 결심까지 한다. 또한 그녀가 석방이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시베리아까지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자택을 처분하고 영지를 정리한다. 여기에는 부모님께 유산을 상속받기 전, 토지의 사적소유를 반대하던 열혈 넘치는 청년이었던 그가 마슬로바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시 그 때를 상기하며 과거에 지녔던 생각들을 몸소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던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네흘류도프의 '부활'과 더불어 마슬로바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고모네 댁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교태를 모르는 순박한 소녀였다. 그러나 처음의 그녀와 네흘류도프 사이의 정신적인 사랑에서 후에 변질된 네흘류도프의 육체적 욕망에 휩쓸리고 나서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임신을 한 상태에서 하녀일을 계속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저택에서 나와 가정부 일을 전전하다가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유곽으로 빠지고 만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도덕적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몸을 파는 행위를 나쁘다고 인정한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깔아뭉개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네흘류도프의 진심을 느끼면서 그녀도 변화하게 된다. 그 변화는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중에 숙영감옥에서 정치범들과 어울리면서부터 크게 나타난다. 창녀 생활을 했을 때 지녔던 삶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털어내고 긍정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는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의 결혼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약 그 둘의 결혼으로 끝났다면 해피엔딩이지만 재미없는 이야기 되었을 것이다.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마슬로바를 마차로 따라간 네흘류도프는 황제에게 보낸 탄원서가 성공하여 기뻐하고 그 소식을 그녀에게 알리지만, 그녀에게 들은 건 정치범 시몬손과 함께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시몬손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기 보다, 그녀가 네흘류도프와 결혼했을 때 그에게 처해질 안좋은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가 작품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던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는가', '인간 개개인이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는가'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서 사법제도, 사유제, 교회(신앙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 군대, 억압받는 민중에 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다. 마슬로바의 재판과정이라든가, 교도소 수용자들의 사연들, 정치범들이 나누는 이야기, 네흘류도프가 농민들을 접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내용, 네흘류도프와 매형의 논쟁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톨스토이가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들을 해결할 방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설의 맨 끝부분에 나온다.

   네흘류도프는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악에서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자기가 남을 벌주고 선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2권-375)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법적인 공인을 받고 있는 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임을 네흘류도프는 알게 되었다. (2권-376)

   네흘류도프는 이 같은 사상의 근원적인 구절을 성경에서 찾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중략)...(성경의 계율을)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인간 사회는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갖게 되고 네흘류도프를 분노케 하던 온갖 폭행도 자연 사라지며 인류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지상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권-376~377)

   역시나 톨스토이의 해결책은 신앙을 통한 극복이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어 본 나로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성경의 계율 다섯 가지를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인간 사회에 실현만 할 수 한다면(그리고 실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 모든 문제점들이 해결되고 자연히 지상천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와 신앙심을 강조하는 면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일면 상통하고, 그 점은 둘 다 별로지만 난 그래도 도선생이 좀 끌린다. 신경질적인 문체와 극단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캐릭터들, 그 속에서 긴장감의 연속을 엮어나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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