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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스트 신채호"에 관한 발표를 준비하던 중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제목과 같이 한국의 '아나키스트'에 대해서 쓰여있을거라 기대하고 펼쳐들었다. 목차의 굵직한 제목에서도 신채호, 류자명, 박열, 유림, 하기락 이렇게 5명의 한국의 아나키스트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지면의 대부분은 한국의 '아나키즘'에 대해서, 특히 역사학자 이호룡의 한국아나키즘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판하는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의 삶보다는, 주로 한국의 아나키즘을 바라보는 저자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아나키즘에 관한 통속적인 관념과 이호룡과 존 크럼 등의 의견에 반박하는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굳힌다. 일반적인 인물사 나열이었다면 재미없었을지도 모른다. 신채호만 읽어볼까 하다가 결국엔 다 읽어보게 되었다.
   작년 초에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이문창)를 읽었는데 무척이나 따분하고 지루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유는 민족을 중요시하고, 단체를 조직하며 정치에 참여하는 우리나라의 아나키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일제치하의 특수한 환경적 요인 때문에 '민족주의'를 그 토양으로 하였다. 저자는 아나키즘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당시 한국적 특수한 상황을 놓고 본다면 아나키즘과 민족주의는 양립할 수 있으며, 하기락의 말처럼 오히려 "이것으로 저것을 내실화하는 보완관계"임을 주장한다. 또한 진정한 아나키스트란 '무정부'라는 문자나 개념의 노예가 되는게 아니라 반강권 상호부조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정부는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어떠한 원리원칙 하에 아나키즘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초기 아나키즘이 일제강권에 맞선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창조를 위한 파괴의 '혁명적' 아나키즘이었다면, 해방이후에 나타난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처럼 평등이 없고 착취를 하는 정부, 공산주의처럼 자유가 없고 억압을 하는 정부가 아닌,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는 지방공동체사회에 기반한 최소한의 정부를 추구하는 '개혁적' 아나키즘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더 나아가 이러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급진적 개혁주의'에 입각한 시민사회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며 마무리짓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아나키즘에 여러가지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런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에 놀랐다. 한편으로는 '혁명적'에서 '개혁적'으로 변한 한국의 아나키즘을 조금 지나치게 편들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저자가 말했듯이 개혁적인 것이 혁명적인 것보다 아래에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은 폭력일진데 아무리 최소한의 정부라 하더라도 과연 '착한 정부'가 존재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참고로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경제적 의미의 최소한의 정부와는 다르다) 저자가 한국적 아나키즘으로 미화포장을 해도, 내 눈에는 비겁한 타협으로 보이는 것은 내가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급진적 개혁주의라는 개념도 너무 모호한 감이 있다.
   인간의 본능적인 권력추구의 습성을 제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며, 권력을 없앨 수 있다 해도 문제일 것이다. ...어렵다....


꼬다리> 아주 예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크로포트킨을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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